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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0.16 [20:16]
일생을 바친 군왕, 세종과 그의 충신 황희하늘의 시련마저 품어 안은 세종의 의지와 헌신
세종대왕은 조선 시대의 군주로, 그의 통치 방식과 일상은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귀감이 된다. 그가 남긴 많은 명언 중 하나는 다음과 같다. “하늘이 나에게 복을 박하게 준다면 나는 나의 덕을 두터이 하여 이 복을 맞이하고, 하늘이 내 몸을 수고롭게 한다면 나는 마음을 편안히 하여 이를 보충하리라.” 이 말처럼 세종은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나라와 백성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재위 30여 년 동안 세종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그는 아침, 낮, 저녁, 밤으로 나누어진 “왕의 사시때”에 따라 업무를 진행했다. 아침에는 신료들과 정치를 논하고, 낮에는 방문객들을 맞이했으며, 저녁에는 조정의 법령을 검토했다.
세종은 하루도 쉬지 않고 왕의 책임을 다했다. 왕의 일과는 해가 뜨기 전에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대비와 왕대비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중요한 아침 업무였다. 원경왕후는 아들의 아침 문안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기에 세종은 몸이 고달파도 이 일을 빼놓지 않았다.
경연 시간에는 신료들과 학문 및 정치를 토론하며 조선의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이 자리에서는 학문을 논하는 동시에 당시 현안들이 쟁점으로 부각되기도 했다. 경연이 끝나면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조회에 참석했다. 조회는 백관이 모두 모이는 자리로, 정식조회와 매일 열리는 약식조회가 있었다. 정식조회는 한 달에 네 번 열렸고, 약식조회는 매일 이루어졌다.
정식조회가 끝나면 세종은 신료들로부터 업무 보고를 받았다. 이 보고 과정에는 반드시 사관이 동석하여, 업무의 내용을 기록했다. 또 조계법이라 불리는 아침 업무 보고 이후 윤대관이라 불리는 각 부서의 관료들이 세종을 찾아와 부서 관련 업무를 보고했다. 세종은 하루에 약 30건 이상의 상소문과 100건이 넘는 공무 서류들을 읽어야 했기에 시간이 빠듯했다.
점심 이후에는 주강에 참여해 학문을 익히고, 지방에서 올라온 관료들을 만나 현안을 논했다.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에는 야간 경계 업무를 챙기며, 직접 군사들과 장교들의 명단을 확인하고 야간 암호를 정했다. 이러한 모든 일정을 마친 후에도 저녁에는 다시 석강에 참석해 학문을 익히고, 이후 밀린 업무를 처리했다. 세종의 하루는 밤늦게까지 이어졌고, 이 같은 일정은 평소에도 거의 변하지 않았다.
세종은 자신의 건강을 희생하면서까지 정사에 매진했다. 말년에는 눈에 통증이 심해져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로 고통을 겪었지만, 세종은 결코 자신의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신하가 세종의 건강을 걱정하며 휴식을 권했을 때, 그는 당나라의 헌종이 게을러져 나랏일을 소홀히 했던 예를 들며 게으름의 위험을 경계했다. 세종에게 있어서 부지런함은 임금으로서의 책무였고, 나라를 위해 잠시도 한눈을 팔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세종은 3정승을 포함한 고위 관료가 사망했을 때나 세시풍속 명절에는 업무에서 잠시 해방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정말 쉬는 날이라 할 수 있는 날은 거의 없었다. 세종이 병으로 인한 통증으로 눈물을 흘리며 업무를 수행했음에도, 자신이 결재하지 않으면 나라가 멈춘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세종의 곁에는 충신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황희는 세종이 가장 신뢰한 신하였다. 황희는 원래 태종의 신하였지만, 세종의 부름을 받아 30여 년 동안 정승으로 일하며 세종을 보좌했다. 황희는 말수가 적고 신중한 성품으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보다는 조정의 안정과 백성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여겼다. 세종은 처음에는 황희가 양녕의 폐위에 반대했던 일로 그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은 점차 그의 충성심과 정치 철학에 감탄하며, 그를 신뢰하게 되었다.
황희는 세종의 정치를 보좌하며 법치와 민본 사상을 강조했다. 그는 법이 지켜져야 백성들이 안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백성을 위하는 임금이라면 법을 지키는 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법치사상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황희는 또한 계급과 출신에 얽매이지 않는 인재 등용을 주장했다. 그는 세종에게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말을 남기며 장영실과 같은 인재의 등용을 적극 지지했다.
황희는 백성을 위한 정책을 펼치며 여론을 존중하는 자세를 잃지 않았다. 그는 백성들이 정책에 대한 비판과 여론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고, 이는 세종의 정치 철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세종은 이러한 황희의 사상을 존중하며 정책으로 발전시키려 노력했다. 황희는 또한 백성이 희망을 가지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국가의 정책이 일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에 따라 세종은 백성을 위한 정책을 꾸준히 펼쳤다.
황희는 노비 출신이라도 재능 있는 인물이라면 등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실제로 일본에서 도망해온 왜인 26명을 받아들여 망명을 허용하도록 세종에게 건의하기도 했다. 또한 군이 전투에서 야인의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이를 탄핵하여 장수를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인간애와 배려는 세종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황희는 세종에게 있어 정치적인 조력자이자 스승과 같은 존재였다. 그가 세종을 위해 펼친 정치사상의 상당수는 민본주의와 평등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황희는 자유로운 정치적 환경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으며, 이는 세종의 정책에 반영되어 조선이 더욱 번영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황희는 자신의 정치사상을 일관되게 주창하면서도 항상 세종의 결정을 존중했다.
세종은 평생을 자신의 곁에서 조선의 발전을 위해 헌신해온 황희에게 늘 감사함을 느꼈다. 그의 충성심과 헌신적인 자세는 세종뿐만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에게도 큰 울림을 주었다. 황희는 세종을 만나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이 자신의 큰 영광이라고 고백했고, 세종 역시 그런 황희의 진심에 늘 감동했다. 원본 기사 보기:내외신문 <저작권자 ⓒ 월간 기후변화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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