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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성스러움’ 위에 놓인 영토의 정치와 100년의 부채

-종교가 아닌 ‘땅’과 이권: 예루살렘을 둘러싼 민족·주권 경쟁의 실체

-영국의 이중계약과 분할의 유산: 후세인-맥마흔·사이크스-피코·벨푸어가 남긴 균열

-난민과 정착촌의 시간: 1948년, 열쇠와 귀환권, 그리고 끝나지 않은 경계선

-국제화된&

김학영 기자 | 기사입력 2025/10/10 [09:09]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 ‘성스러움’ 위에 놓인 영토의 정치와 100년의 부채

-종교가 아닌 ‘땅’과 이권: 예루살렘을 둘러싼 민족·주권 경쟁의 실체

-영국의 이중계약과 분할의 유산: 후세인-맥마흔·사이크스-피코·벨푸어가 남긴 균열

-난민과 정착촌의 시간: 1948년, 열쇠와 귀환권, 그리고 끝나지 않은 경계선

-국제화된&

김학영 기자 | 입력 : 2025/10/10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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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동전쟁은 1948년부터 1973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간에 발생한 대규모 군사 충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의 전쟁이 장기화하는 이유는 종교가 아니라 ‘땅’과 이를 둘러싼 이권, 그리고 강대국이 남긴 불완전한 제도적 유산 때문이다.

 

아브라함의 가나안 이주, 이집트 노예 생활과 여호수아의 재정복, 통일왕국의 분열과 바빌론 유수, 로마의 지배와 두 차례 유대 독립전쟁 좌절은 유대인의 디아스포라를 낳았고, 수세기 후 유럽의 조직적 박해와 러시아의 포그롬, 프랑스 드레퓌스 사건은 “어디에도 안전한 삶의 공간이 없다”는 집단적 자각을 키웠다.

 

테오도르 헤르츨의 시온주의는 ‘국가’라는 안전장치를 현실화하려 했고, 유대 민족 기금으로 팔레스타인 토지 매입과 정착이 진행되면서 이미 아랍인들이 살아온 공간에 새로운 귀환 서사가 포개졌다.

 

1차 세계대전기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서한으로 아랍 독립을 ‘약속’하는 한편, 사이크스-피코 협정으로 프랑스와 중동 분할을 도모했고, 벨푸어 선언으로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국민적 고향’ 건설을 지지했다.

 

같은 공간에 상충하는 약속 세 개를 얹은 이중·삼중계약은 전후 국제질서 속에서 폭발했다. 영국 위임통치 하 유대인 이민이 급증하고 홀로코스트 이후 유입이 가속되자 팔레스타인 사회는 위기의식으로 응답했다.

 

1936~39년 대항쟁은 팔레스타인 측 민족 정체성의 형성과 저항의 제도화를 보여줬고, 영국의 이민 제한 약속은 다시 극렬 시온주의 테러(킹 데이비드 호텔 폭파)로 되받아졌다. 미국이 강대국으로 부상한 2차대전 이후 유엔 분할안(1947)은 두 민족의 자결을 ‘지도’로 나누려 했지만, 땅의 배분 비율과 연속성, 예루살렘의 지위는 불만과 전쟁을 부르는 구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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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민족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역사와 문화를 형성해 온 집단입니다. 이들의 역사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 등 족장 시대부터 시작되어, 이집트 노예 생활과 출애굽, 가나안 정착, 통일 왕국과 분열 왕국 시대, 바벨론 포로기 등을 거치며 발전해 왔습니다    

 

영국 철수(1948.5.14) 직후 이스라엘 독립 선언과 제1차 중동전쟁은 이스라엘의 승리, 영토 확대, 그리고 70만 명 규모의 팔레스타인 난민화로 귀결됐다. ‘열쇠’는 귀환의 권리를 상징하는 일상의 물건이 되었고, 가자와 서안은 미완의 영토·주권 문제의 무대가 됐다. 이후 전쟁은 되풀이됐다.

 

제2·3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연합군은 조정 실패와 역량 격차로 후퇴했고, 이스라엘은 점령지를 늘렸다. 하르툼의 ‘3무(No Peace·No Recognition·No Negotiation)’ 결의는 원칙을 확인했지만 현실의 교착을 심화시켰다.

 

전환은 오일쇼크와 함께 왔다. 1973년 전쟁 뒤 석유 금수로 국제경제가 흔들리자 미국 중재 하 캠프 데이비드 협정이 체결됐고, 이스라엘은 시나이를 이집트에 반환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는 ‘차후 논의’로 밀렸고, 사다트는 카이로 개선 3년 만에 암살당했다.

 

평화는 지역 내 정치·사회 균열을 촉발하는 역설을 드러냈다. 같은 시기, 1979년 이란 혁명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반제·반억압의 상징으로 재정의하며 분쟁을 종교·이념·지정학의 교차점으로 끌어올렸다. 냉전 하 중동은 미국·소련의 각축장으로 고착됐고, 무장조직과 대리전 양상은 테러와 보복의 악순환을 제도화했다.

 

1972년 뮌헨 올림픽 테러는 이 비극의 국제화 순간을 상징한다. 검은 9월단의 선수촌 침입과 인질극, 독일의 서툰 진압,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대표단 11명 전원 희생, 이어진 항공기 납치와 테러범 석방, 리비아에서의 ‘영웅 대접’까지 일련의 과정은 팔레스타인 문제를 세계 전면에 각인시켰으나, 피해의식과 보복 논리를 양측과 국제사회에 동시에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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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2024년 10월 26일 이스라엘의 공격으로 가자지구 북부 베이트 라히아에 있는 카말 아드완 병원에서 구급차가 파손된 모습을 보여준다.전쟁멈춤이 ESG - 사진 AFP    

 

이후 오슬로(1993)와 캠프 데이비드(2000)의 시도는 ‘두 국가 해법’의 상징이었지만, 정착촌 확대·안보장치와 주권의 교환 비율, 예루살렘과 난민 귀환권, 영토의 연속성, 수도 문제에서 출구를 찾지 못했다.

 

가자·서안의 분할 지배와 팔레스타인 내부 정파 갈등, 이스라엘 내 연정정치의 불안정은 상호 불신을 ‘정치적 생존’의 전제조건으로 만들었다. 국제적으로는 미국의 중재 역할 편향성 논란, 아랍권 각국의 국익 우선화, 이란·헤즈볼라·하마스의 비대칭 전략, 걸프국가의 ‘안보·기술·자본’ 거래와 정상화 시도(아브라함 협약) 같은 상충 흐름이 한 지붕 아래 두 민족 해법을 더 멀어지게 했다.

 

결국 이 분쟁의 본질은 두 가지다.

 

첫째, 영토와 주권: 국경선, 정착촌, 예루살렘, 난민 귀환·보상, 치안 통제와 군축·비무장화의 교환 비율을 국제적 보증 하에 동시에 패키지로 풀어야 한다. 둘째, 안전과 존엄: 로켓·공습·테러·표적 제거의 악순환을 끊을 인권·국제인도법 준수와 민간인 보호 메커니즘, 교육·경제·통치 역량 강화가 병행돼야 한다.

 

‘두 국가’든 ‘연합국가’든 핵심은 상호 인정을 제도화하고, 영토·안보·난민·수도·자원(물·가스) 같은 하드 이슈를 기한과 인센티브가 명확한 단계별 로드맵으로 연결하는 것이다. 강대국의 보증은 약속 이행을 담보해야 하며, 지역국의 이해는 투명하게 결박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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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스라엘 군인들이 전장에서 희생되는 상황에서 네타냐후 부인이 호화로운 생활을 즐긴다는 비난은 대중의 분노를 더욱 키우고 있으며, 이는 네타냐후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사진=위키피디아)    

 

예루살렘의 ‘성스러움’은 신앙의 문장으로 아니라, 서로의 삶을 보호하는 세속적 행정과 법치의 언어로 번역될 때에만 현실이 된다.

 

오늘의 총성은 우연이 아니라 100년 전 잘못 설계된 계약과 불완전한 분할, 그리고 그 위에 쌓인 보복의 역사다. 해법 또한 ‘지도 위 선’이 아니라 ‘신뢰의 비용’을 누가 먼저 지불할지에 대한 정치적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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