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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기술’이 아니다. 분위기다

염치없는 밤중의 문 두드림, 그럼에도 열리는 하늘의 문

확률의 시대를 거슬러, 확신의 세계로 들어가다

응답 없는 기도를 대신 겪으신 분, 그래서 가능한 기도

서창희 목사 | 기사입력 2026/02/23 [09:11]

기도는 ‘기술’이 아니다. 분위기다

염치없는 밤중의 문 두드림, 그럼에도 열리는 하늘의 문

확률의 시대를 거슬러, 확신의 세계로 들어가다

응답 없는 기도를 대신 겪으신 분, 그래서 가능한 기도

서창희 목사 | 입력 : 2026/02/23 [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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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사람교회 서창희 목사    

기도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종종 이런 장면을 본다. 주기도문을 줄줄 외운다. 기도 순서도 안다. 기도의 문장도 익숙하다. 그런데 막상 삶이 흔들리는 자리에 서면, 입이 굳는다. “지금 내가 기도할 자격이 있나.” “얼마나 더 해야 응답하시나.” 기도는 아는데, 기도는 되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것은 기도의 이론이 아니라 기도의 분위기다.

 

나는 대학 시절, 캠퍼스 전도를 한다며 홍대에 있는 영혼들을 만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 친구들과 함께 했던 생각은 단순했다. 적진에 들어가려면 적진의 분위기를 알아야 한다.

 

그래서 당시 유명하던 홍대 클럽에 들어가 보았다. 들어가자마자 무너졌다. 소리는 내가 상상한 것보다 훨씬 컸고, 분위기는 내가 따라갈 수 없는 리듬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분위기를 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몰랐다. 결국 30분쯤 버티다 나왔다. 그때 깨달았다. 이론을 안다고 해서, 그 세계가 내 것이 되는 게 아니구나. 분위기를 모르면, 유익을 누릴 수 없구나.

 

기도도 그렇다. 주기도문을 외우면 뭐하나. 그 기도가 실제로 내 인생의 언어가 될 때, 어떤 분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는지 모르면, 우리는 기도를 ‘할 줄 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기도 앞에서 매번 멈춰 서게 된다.

 

예수님은 기도의 분위기를 직관적으로 가르치신다. 누가복음 11장에는 밤중에 떡을 빌리러 간 친구 이야기가 나온다. 그 시대에는 빵을 그날 구워 그날 먹었다. 밤이 되면 내줄 떡이 없다. 그런데 손님이 찾아왔다. 고대 사회는 손님을 환대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었다. 먹일 것이 없으니, 옆집 친구에게 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시간이다. 밤중이다. 대부분의 집은 원룸 같은 구조였고, 아이들과 가족이 한 바닥에 누워 잔다. 밤중에 문을 두드리면 온 집안이 깬다. 엄청난 결례다. 무례다. 상식적으로, 인간관계의 예절로 보면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종종 이렇게 읽어 왔다. “더 뻔뻔해져라. 더 끈질기게 매달려라. 많이 기도해라.” 그런데 그렇게 읽으면 남는 것은 죄책감뿐이다. “나는 충분히 못했나 보다.” “세 번이라 부족했고 다섯 번은 해야 했나.” 그렇게 기도는 위로가 아니라 채찍이 된다. 하나님은 마치 ‘기도 횟수’를 채우면 문을 열어주시는 분처럼 보인다.

 

하지만 예수님의 초점은 거기에 있지 않다.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핵심은 이것이다. 밤중에, 염치없게, 급박하게 찾아간 그 사람에게도 결국 떡이 주어졌다. 응답이 있었다. 그러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무례함을 흉내 내는 기술’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의 마음이 어떤 분위기인가’다. 우리는 자꾸 하나님을, 예절과 절차를 따지며 “지금 그 입으로 그런 소리를 하냐”라고 말하실 분으로 상상한다. 그래서 스스로 기도를 미룬다.

 

우리의 기도는 종종 이런 형태를 띤다. “주님, 제가 봐도 염치 없습니다. 제가 일주일 내내 주님을 떠나 있었습니다. 제 상태가 더럽습니다. 그러니 3주만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3주 정결 시간을 가진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며 익힌 예절이 하나님 앞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가 상상하는 기도의 분위기는 늘 ‘늦게 오면 혼나고, 준비가 안 되면 거절당하는’ 분위기다.

 

그런데 누가복음 11장은 그 분위기를 깨부순다. 하나님은 밤중에도 응답하신다. 급박해도 외면하지 않으신다. 염치없어 보여도,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 이걸 알게 되면 기도의 문이 달라진다. “이렇게 기도해도 받아주시는구나.” “이 상태로도 나아갈 수 있구나.” 기도는 채찍이 아니라 소망이 된다.

 

나는 이 ‘분위기’가 어떤 것인지, 신학대학원 시절의 경험으로도 배웠다.

 

교수님들은 보통 답이 늦다. 이메일을 보내면 두 달 뒤에 답이 오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설교 준비가 급박할 때, 나는 조심스레 페이스북 메신저로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보내고 30초 만에 ‘읽음’이 떴고, 곧바로 답이 왔다. 추천 도서와 논문이 쏟아졌다. 그때 깨달았다. 이 교수님은 이메일보다 메신저의 분위기에 익숙하구나. 내가 그 분위기를 알았다면, 그 좋은 지식을 더 빨리 누릴 수 있었겠구나. 사람과의 관계도 분위기를 알아야 누린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신을 선포하신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이 말은 단순한 격려가 아니다. 세계관의 충돌이다. 이 시대는 확률로 산다. 취업률, 합격률, 성공률. “해보면 될지도 몰라.” “시도하면 가능성이 올라가.” 우리는 그 언어에 젖어 기도도 그렇게 바꿔 버린다. “기도해봐. 들어주실지도 몰라.”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하지 않으신다. 예외 없이, 구하면 주신다. 찾으면 찾는다. 두드리면 열린다. 기도는 확률의 게임이 아니라 확신의 세계다.

 

그러면 바로 이런 질문이 나온다. “기도에는 실패가 없다면서요. 그런데 내가 원하는 건 안 주시던데요.” 예수님은 이어서 또 하나의 확신을 주신다. 기도에는 차선이 없다.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는 아버지가 어디 있나. 알을 달라는데 전갈을 주겠나. 하나님은 악한 인간 부모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는 것처럼, 더더욱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다.

 

여기서 중요한 적용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았다면 구했을 그것을 주신다. 나는 상황을 일부만 안다. 그래서 “이게 필요하다”고 구한다. 하나님은 전체를 아신다. 그래서 내가 보기엔 “안 주셨다”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사실은 더 깊고 더 정확한 응답을 진행하신다. 그러니 기도는 실패가 아니다. 기도는 언제나 최선으로 향한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확신이 감정이나 긍정의 주문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기도의 근거는 십자가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말씀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외치셨다. 응답이 없는 기도를 예수님이 먼저 겪으셨다. 원래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맞이해야 할 단절과 저주를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 그래서 내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응답 없는 미래는 내 몫이 아니다.

 

누가복음 11장의 끝은 결국 여기로 모인다. 하늘 아버지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신다.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이것이 최종 응답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잃지 않게 하시는 보장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염치없어 보이는 나의 자리에서, 급박한 마음으로 문을 두드릴 수 있다. 기도는 내가 하나님을 설득하는 시도가 아니라, 이미 응답이 보장된 자리에서 하나님께 다시 걸어가는 길이다.

기도는 ‘기술’이 아니다. 분위기다. 그리고 그 분위기의 이름은 은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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